“사람들은 자기 아버지보다 자기 시대를 더 닮았다.”1
이미지의 바다
1・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 베를린 장벽 붕괴, 9.11 테러와 같은 충격적 시각 이미지의 폭발 시점마다 모던 세계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 인터넷의 발전은 특히 이미지에 의해 촉발되는 충격을 전례없는 속도로 세상에 퍼뜨리는데 일조했다.2 이십세기 말부터 시작된 인터넷 혁명은 제한적인 물리세계를 벗어난 가상의 웹 공간에서 정보를 상호 연결시킴으로써 인류사에서 유례없는 정보의 확산과 증가를 야기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없이 무한히 뻗어나가는 이 새로운 매체의 발전은 이른바 ‘정보의 바다’를 만들어냈고, 특히 시각적 디지털 이미지(digital image)의 범람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스마트폰 한켠에서 우리를 매순간마다 유혹하고 있는 SNS처럼 자극적 이미지의 무한한 연결(흐름)과 확산은 데이비드 조슬릿(David Joselit)의 말처럼 가히 ‘폭발(explosion)’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경이다.3
오늘날 네트워크가 직・간접적으로 매개하는 모든 것은 이미지의 형태를 가진다. 유튜브와 넷플릭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의 SNS, 팝업 배너 광고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음악을 듣거나 전자책을 읽기 위해 사용하는 하이퍼매개(hypermediacy)로서의 모든 디지털 인터페이스 자체가 이미지이다. 동시대 우리의 모든 사회・경제・문화적 활동은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존재로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와 기 드보르(Guy Debord)가 시뮬라크르(simulacre)와 스펙터클(spectacle) 개념을 통해 이미지가 가진 불가해한 힘에 대해 충분히 경고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예술 매체는 물론이고, 아날로그 미디어에서도 이미지는 물리적인 영역을 탈피하여 생각되진 않았다. 필름 사진, TV나 네온 광고판과 같은 아날로그 미디어들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전달하지만, 서로의 기술 형태가 너무 달라서 혼용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필름 사진으로 인화된 이미지를 다시 구형 브라운관에서 상영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 모든 번거로운 과정을 생각해 본다면, 이미지와 물리적 매체가 떨어져서 생각될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그러나 디지털은 모든 매체의 연결방식을 0과 1이라는 문법으로 통일했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 이미지 한 장은 네트워크를 타고 거실의 TV, 지하철의 모니터, 코엑스의 광고 스크린, 필요하다면 지구 반대편 누군가의 자동차 네비게이션 화면에서도 상영될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네트워크로서 연결된, 오늘날의 이미지를 “무한하게 재매개(remediation)되기 쉬운 시각적 바이트(byte)”로 바라본 조슬릿은 지난 세대 미술계의 이론가들과 예술가들이 차마 버리지 못했던 ‘매체(medium)’와 거기서 파생된 ‘포스트매체’ 개념이 모두 한계에 봉착했다고 보고, 포맷(format)의 관점에서 예술과 이미지를 해석할 것을 제안한다.4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은 이미지를 “사람들, 풍경, 정치, 사회적 체계를 형성하고 영향을 끼치며 다양한 지지물 사이를 이동하는 에너지와 물질의 결절점(node)”이라고 정의한다.5 이와 같이 이미지는 더 이상 단단한 물리적 실체를 벗어나, 네트워크 안에서 다양한 형식(form)과 흐름(flow)으로 존재한다.
자신을 더 많이 복제하여 우위를 선점하려는 이미지들로 가득한 이 바다는, 마치 지구의 바다에서 초기 유기생명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을 때를 연상시킨다.6 이미지의 바다는 결코 잔잔하지 않다. 네트워크 유속을 따라서 이미지들이 소용돌이처럼 빨려들어가고, 내뱉어진다. 이미지는 서로가 서로를 끝없이 참조한다.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의 재료가 된다. 네트워크가 확산될수록 이러한 참조와 생산은 더 가속화되고, 실재가 더욱 견고해지며, 맥락을 형성한다.
이미지 다이버들(Image Divers)
이 무한한 바다에서 나고 자란 첫 세대는 이전 세대와는 명확히 다른 특징, 즉 고도로 디지털화(digitized)되었다는 점에서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로 불린다.7 스마트폰의 발전으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면서, 이들 디지털 세대는 광학적 매체가 매개하는 이미지들의 바다 속에서 항상 잠수해있는 상태나 마찬가지가 되었다.8 마치 깊은 물 속에 빠진 것처럼, 단순히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자주 접하는 것을 넘어서 모든 감각과 삶의 조건이 이미지에 의해 압도되어 있는 것이다.
2014년 베이징 UCCA, ‘포스트인터넷(Post-Internet) 미술’을 주제로 한 첫 대규모 전시였던 ≪Art Post-Internet≫전의 설문에서, 진 맥휴(Gene McHugh)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등장을 두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대립이 더는 중요하지 않은” 분기로 바라본다.9 마리사 올슨(Marisa Olson) 등이 동시대미술의 특징적 경향으로 제시했던 ‘포스트인터넷’ 미술은 넷아트와 반대로 미술을 다시 실제 공간으로 들여온다.10 유년기부터 디지털 기기와 접촉하고, 디지털 세계를 탐방했던 동시대 젊은 작가들은 실재(實在) 공간과 가상의 공간 모두를 네이티브로서 체화(體化)한다. 마치 뒤샹랜드와 튜링랜드처럼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가상과 현실이지만, 두 세계에 양 발을 하나씩 걸치고 있는 디지털 세대 예술가들에게는 양쪽의 세상이 전부 모국이며, 두 세계의 언어가 모두 모국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치 반복해서 수면 위(오프라인)로 떠올랐다가 다시 수면 아래(온라인)로 잠수하듯, 두 세계 사이를 포착하고 중재하는 것이 이들만의 독특한 예술 언어로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다. 이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아날로그 기기들은 자취를 감추거나 공고했던 지위를 잃어버리고 있으며, 그 자리를 디지털 기기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신구의 세대교체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인간이 쌓아올린 모든 시스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디지털로의 이행이라는 비가역적인 변화는 우리의 삶뿐 아니라 그에 기반한 예술의 모습도 바꾸고 있다. 앞으로 디지털 네이티브가 전면에 나서서 앞으로 펼쳐치게 될, 예술의 다음 장은 어떤 모습일까.11
니콜라 부리요(Nicolas Bouriaud)는 첨단 기술이 예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했었다. 예술이 가진 비평적 임무에서 밀려나, 첨단 기술을 꾸며주는 장식으로만 존재할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마따나 오늘날 우후죽순처럼 넘쳐나고 있는 많은 미디어아트 ‘쇼’는 정확히 그렇게 작동한다. 그러나 그러한 유행 속에서도 작금의 예술이 비평을 잃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은 사람의 문제일 뿐이다. 어쩌면 새로운 시대의 예술생산자이자 예술향유자로서, 이미지의 바다를 유영하는 디지털 세대들이야 말로 첨단 기술의 향연 속에서, 그리고 압도적인 이미지의 격류 속에서, 비평적 관점을 잃지 않고 이미지를 예술답게 승화할 단서를 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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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아랍 속담, Guy Debord, Comments on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trans. Malcolm Imrie, Verso, (London: 1990),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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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인 전쟁이나 재난의 참상을 겪는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매체를 통해 그것을 시각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인식과 사고에 트라우마를 촉발하고, 나아가 미래에 대한 인간의 낙관주의적 인식과 경제의 통화 흐름에도 주요한 변화를 야기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학적, 시각적, 이미지적 쇼크에 의해서 세계가 유의미한 변화를 일으킨다고 가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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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슬릿은 이미지와 이미지 간의 연결이 빚어내는 저항적 가능성을 따졌다. 그가 말하는 이미지의 폭발은 단순히 이미지가 많아졌다는 것을 넘어서, 네트워크에서 폭발적으로 빠르게 전파되는 이미지의 순환과 관련된다.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A, 2022),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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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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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미지)은 증식하고 변형하며, 활성화하는 기이한 능력을 획득했다.” 히토 슈타이얼, ⌜인터넷은 죽었는가?⌟, 『면세 미술: 지구 내전 시대의 미술』, 문혜진, 김홍기 옮김, (워크룸 프레스, 2021), 168-1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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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정보 복제자로서의 밈(meme) 개념은 복제될 수 있는 모든 문화・현상・사유를 포함한다. 따라서 모든 이미지는 밈의 하위 개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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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이들 세대를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s)’로 부르기도 한다. 새로운 세기에 대한 열망과 기대감을 담은 밀레니엄(Millennium), 즉 ‘새 천년’이란 단어에서 가져온 것으로, 진취적인 미래세대의 ‘청년’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뒤를 이어서 등장한 세대는 Z세대(Generation Z)로 명명되어 불러지고 있다. 하지만 모던과 컨템포러리를 하나의 분기점으로 정확하게 잘라낼 수 없듯, 출생 시기에 따른 세대 구분은 사실 편의를 위한 모호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출생 시기로 구분한 세대는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최근 국내에서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합쳐 MZ로 붙여 부르기도 하는데, 이러한 작명 방법은 너무 넓은 세대를 뚜렷한 기준없이 지나치게 단순화함으로써 세대 내의 다양성과 계급 문제를 논의에서 가려버릴 수도 있다. 따라서 출생 시기를 기준으로 하기보다는 어떤 문화적・역사적인 공통점으로 세대를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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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접속하는 행위를 말그대로 이미지의 바다 속을 ‘다이브(dive)’한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시로 마사무네(士郎正宗) 원작, 오시이 마모루(押井守) 감독의 SF 애니메이션 (1995)에서는 인터넷과 같은 개념인 전뇌 네트워크(NET)에 접속하는 것을 다이브라고 지칭하는데, 흥미롭게도 이 다이브의 행위에는 타인의 고스트(마음, 영혼과도 비슷한 개념)에 접촉하는 것도 포함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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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인터넷은 약 3회에 걸쳐 진퇴를 거듭했다. 먼저 2006~09년 사이다. 예술을 온라인에서 만든다는 획기적인 개념이 거론되며 갖가지 실험이 벌어졌다. 두번째 조류는 2009년부터 2012년까지였다. 작품을 전시하는 다양한 ‘공간’의 개념화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하던 때다. 마지막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출현하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대립이 더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22인, 포스트인터넷아트를 말한다⌟ 아트인컬쳐, 2016년 11월호, 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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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post)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시간성과 모호함 때문에 다소 논쟁적인 표현이 되었지만, 인터넷의 직간접적인 영향 아래에서 물리적 세계와 디지털 세계 사이의 경계가 어떻게 흐려졌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나 소통이 변화함에 따라 동시대미술과 문화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는지에 대해 해석해보려는 하나의 접근 방식으로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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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선 아직까지 디지털 세대의 예술가들을 막연하게 ‘청년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지칭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간결하기에 별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 조금 무정(無情)한 분류법인 듯하다. 디지털 세대들이 예술과 미(美)를 바라보는 관점, 이제는 동시대미술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 특징들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