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won Lee

부산시립미술관 《슬픈 나의 젊은 날》 — 리뷰

부산시립미술관에서 3월 10일부터 8월 6일까지 열리는 정례전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에서는 80년대생의 세 작가 김덕희, 오민욱, 조정환을 초청하여 《슬픈 나의 젊은 날》 전시를 진행한다. 설치 미디어, 영상, 회화로 각자의 장르가 뚜렷한 작가들의 작업은 ‘가속’, ‘에너지 흐름’, ‘인상’ 이라는 세 가지 전시 주제에 맞추어 소개된다.

조정환—불확실성의 여정

3층 전시장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관람자를 맞이하는 주제는 ‘가속’으로, 여기서 가속은 주로 조정환 작가의 평면 회화 작업들을 관통하는 주제로 설정된다. 작가의 회화는 마치 건축 공사 중인 건물을 둘러싼 비계(飛階)나, 층층이 쌓인 봉안(奉安)담을 떠올리게 하는 나무 구조물에 걸려 전시되어 있는데,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그의 이미지들은 작업마다 제각각의 정경(情景)을 담고있지만, 그 저변에는 신자유주의적 ‘성장’을 바라보는 불안한 시선이 내재되어 있는듯 하다. 그 불안은 <레드 얼럿 Red Alert>(2021) 연작처럼 어떤 격정의 추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이상도시 Floating-Units>(2019)와 <IKEA Wave>(2020)처럼 초현실적인 형식을 빌려 재현되기도 하며, 폐허처럼 흔적만이 잔류하는 미지의 영토를 캔버스 위로 불러낸다. 때문에 작가의 일련의 회화들은, 이 불안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을 기록하며 그려진 ‘이상한 나라’의 스케치들처럼 보인다.

조정환의 회화적 여정을 추동하는 요인은 아마도 미래에 관한 불확실성이라 짐작된다. 청년에게 철저한 개인화와 고통의 내면화를 요구하는 사회에 대해서 느끼는 부조리(absurdity)의 감각, 그럼에도 그 사회라는 이데올로기에서 호명되지 못하고 배제될 때의 소외감과 무력감, 그 이중적인 감정은 끝없는 불확실성을 유발하여 하나의 우주적 공포처럼 나타난다.

김덕희—슬픔을 통제하는 방법

‘에너지 흐름’이라는 주제의 두번째 공간에서 받은 첫인상은, 마치 교회나 성당처럼 엄숙하다는 것이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성당 회랑을 모방해 디자인된 공간에서, 조정환의 회화가 공간 양쪽 벽의 측랑(Aisle)부에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걸리고, 그 가운데 중랑(Nave)에는 김덕희 작가의 작업 <하얀 그림자 White Shadows>(2023)의 석고캐스팅된 손들이 미약한 열을 내뿜으며, 통로 바닥 전체에 길게 늘어뜨려 배치된다. 공간 연출 탓일까, 마치 처참한 사고의 잔해들처럼 중앙 바닥에 흩뿌려진 그 손들은, 차마 장례를 치르지 못한 참혹한 무덤처럼 보인다. 아무런 덧칠도 없이 새하얀 석고상들은 타고남은 재나 뼈들처럼 심연과 같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을 뿐, 그것에 히터를 장치해서 온기를 발생시킨다는 발상은, ‘따뜻한 시체’라는 말처럼 무어라 말하기 힘든 역설로 느껴진다. 여기서 나는 김덕희가 강박적으로 온기를 만들어야만 하는 이유가, 외려 그 온기를 느끼기 힘든 세상에 절망해있는 까닭이라고 읽힌다. 차마 세상을 견딜 수 없어서, 그는 오롯이 사람의 연결과 그 체온을 바라보기로 한 것이리라. 그의 작업들 곳곳에 세상과 인간의 차가운 이면(裏面)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내려와 있고, 그 주제는 죽음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그래서 위태롭다.

이 위태로움은 세번째 공간에서 볼 수 있는 김덕희의 <퀀텀드림 Quantum Dream>(2018)에서 더 강렬하게 투영된다. TV모니터에서 뽑혀져 나와 흩뿌려진 LED 다이오드들의 모습은 다분히 충격적이다. 분해된 기계는 마치 죽기 직전의 단말마처럼 숨을 헐떡이듯 점멸한다. 다만 그 광경은 환영주의적 재현과 그 매체의 죽음이지, 이미지 본연의 죽음이 되진 못한다.1 서로의 배열을 잃고 무작위로 흩어진 LED 다이오드에 의해, 디지털 이미지의 외양은 알아볼 수 없는 형상으로 흩어졌지만, 발광하는 불빛들과 재생되는 사운드의 스펙터클(spectacle)을 생생하게 관람자에게 투사한다. 이제 김덕희의 작업이 증명하는 것은 죽여도 죽지 않는 유령같은 존재로서의 스펙터클이다.2

타인의 고통과 죽음은 어쩌면 가장 강렬한 스펙터클일 것이다. 2021년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대만 작가 천제런(陳界仁)은, 그의 작업 <능지 : 기록 사진의 전율 Lingchi-Echoes of a Historical Photograph>(2002)에서 능지형으로 천천히 잔인하게 처형당하는 수형자의 죽음을 기록하여 스크린으로 상영했다. 수많은 구경꾼에게 둘러싸여, 해체당하는 수형자의 표정은 놀랍도록 편안해 보이며, 기묘한 감정을 끌어낸다. 작가에게 그 광경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눈을 돌리지 않고 직시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고통받는 육체의 이미지나 재난의 참상처럼, 언제든 손쉽게 부숴질 수 있는 현실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이미지들에 우리가 시선을 돌리는 것은, 유희와 오락보다는 그 트라우마적 리얼리즘(Traumatic Realism)을 목도하며 생기는 방어기제(defence mechanism)와 연관된다.3 미디어와 전시장에 박제된, 부숴진 현실들을 반복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은 차츰 문을 닫고 무뎌지며, 비참한 세계를 견뎌내는 것이다.

김덕희가 작업에 결부하는 죽음과 그 트라우마들은 이번 전시의 조정환과 오민욱의 작업을 바라보는 중요한 틀을 제공한다. 조정환의 트라우마는 사회적 안전망의 죽음으로 촉발되고, 오민욱의 경우, 트라우마는 이미지로 재현되지 않는, 기억과 망각의 어느 중간지점에서만 관측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역사와 관계맺는다.

오민욱—미래 아카이빙

‘인상’을 주제로 둔, 어둡고 작은 방들로 나뉘어진 세번째 공간에서 오민욱 작가는 기억과 시간을 중요한 형식이자 주제로 가져온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채널 영상 작업들 <마모 Post>(2023)와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습니다 Imageless Arrival>(2020)다. 작가가 두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무대 위로 데려오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일상을 기록하는 수단으로 흔하게 사용하게 된 스마트폰과 같은 휴대용 이미지 저장장치들의 한켠에서, ‘촬영했다’는 사실조차 차츰 잊혀지고 방치되어 쌓인 것들이다. 그 이미지들은 지나간 것들의 기억을 마치 포르말린 표본처럼 현재에 잡아둔다.

오늘날 우리 삶에 일상화된 시각 기록매체—스마트폰, DSLR, 웹캠, CCTV, 자동차 블랙박스 등—의 ‘촬영-아카이브’ 신화는, 아마도 우리의 불완전한 기억에 대한 거센 저항일 것이다. <마모>에서 서정적으로 흐르는 영상은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를 일부러 끊어서 지워낸듯(마모), 분절되어 움직이는 흑백의 무빙이미지들을 보여주는데, 영상은 노이즈와 함께 지워지고 지연되는 프레임들의 변주를 통해 관람자가 느끼는 시간성을 극대화하고, 시간 속에서 마모되는 기억들을 직관적으로 은유한다. 흑백의 노이즈 화면 위로 부상하는 내레이션들은, 작가의 과거 기억 속 누군가와의 대화를 '지금, 여기'로 다시 소환한다. 그것은 실제로 있었던 대화의 온전한 다이얼로그(dialogue)일 수도, 아니면 하나의 이야기(story)처럼 각색되고, 재가공된 대화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사실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바로 그 모호성(模糊性)이야말로 우리가 과거의 기억을 현재로 표상할 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모>가 정지와 지연의 감각으로 과거를 가져온다면,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습니다>는 반대로 쉴 새 없이 연속되는 행위—손가락으로 스마트폰 액정을 넘기는(swipe)—를 통해, 인식되는 시간의 틈새를 파고든다. 오민욱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과거의 사진들은 그저 작가 개인의 사적인 기억들이 모여있는 것들이지만, 이미지로 드러나지 않는 작가 본인의 경험과 감정들이 그 위에서 서로 연결되며 서사(narrative)로서 의미를 생성한다. 오민욱만이 맡을 수 있는 그 이미지들 속 ‘과거의 냄새’를 알 수 없는 우리에게, 그 이미지들은 ‘아무것도 찍히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독일 작가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75분짜리 필름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 Bilder der Welt und Inschrift des Kriges>(1989)에서, 1944년에 찍힌 오래된 항공사진을 통해 목격되는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것은 오래전에 ‘촬영’되었음에도, 누구도 신경쓰지도 않는 흑백의 얼룩으로 이미지 저장장치 안에 존재했을 뿐, 제대로 인식되거나 발견되지 못했기에 수십년이 지나도록 방치됐다. 파로키의 작업에서, 의미를 연결짓지 못하는 기계적 아카이브는 ‘아무것도 찍지 못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참상을 침묵하고 학살을 동조하는 것으로 변모한다. 결국 우리가 어떤 과거의 사건을 기억한다는 것은, 지나간 단편으로서의 이미지만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이 내포하는 의미를 서로 연결지어 하나의 ‘인식의 몽타주’를 만들고, 그것으로 역사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전시의 말미를 장식하는 오민욱의 작업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우리가 세계의 이미지를 기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평평하지 않은 세계

예술을 통해 시대를 비춰볼 수 있다면, 김덕희, 오민욱, 조정환 세 작가들의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서려있는 파토스(pathos, 비애감)는 분명 우리 시대의 청년들의 자화상일 것이다. 오늘날 기성과 언론들이 무책임하게 되뇌이기만 하는, 대한민국의 미술시장이 얼마나 커졌고, 어떤 페어가 매해 최고가를 경신하며 호황이더라 하는 그 모든 말들은 정작 미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상업미술은 상업미술일 뿐이다. 코로나(COVID-19) 팬데믹으로 미술계가 위축됐다는 진단은 안타깝게도 반쪽짜리 진단으로 보인다.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것은 위축될 수 있을만큼 부풀어 봤던 적도 없다. 최고은 작가가 남는 밥과 김치를 나눠달라는 쪽지를 남기고 골방에서 쓸쓸히 죽어야 했던 12년 전 그 해, 2011년에만 5개월 동안 한예종 학생 4명이 연달아 자살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취업률 평가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대학가의 수많은 예술 전공들이 통폐합됐다. “붓을 꺾지 않는 한, 우리는 무직(無職)이 아니다.” 그 당시 미대생들의 외침은 절규에 가까웠다. 지금은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분명 이 모든 고통들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코로나가 명예로운 죽음을 위한 좋은 핑계가 된 듯하지만, 미술이 고달픈 까닭은 가장 반자본주의여야 할 미술이 철저히 자본주의적 잣대로 평가받아야 하는 모순된 상황 때문이 아닐까.

《슬픈 나의 젊은 날》 전시를 읽기 위해, 우리가 마음 속으로 전제해야하는 조건은 분명하다. 세계는 결코 평평하지 않으며—토머스 프리드먼(Thomas L. Friedman)의 염원과는 달리—, 미술은 그 어떤 화해나, 치유와 같은 순진한 말들을 담아 이야기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달콤한 허구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미술을 사유해야 한다.


  1. 디지털에서 매체와 정보는 오롯이 분리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2. 유령, 망령의 뜻을 지닌 specter(spectre)와 볼거리, 구경거리를 뜻하는 spectacle은 ‘보다’라는 뜻의 라틴어 spect를 어근으로 공유한다. 

  3. Hal Foster, The Return of the Real, (London : The MIT Press, 1996), 130-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