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won Lee

살아봐야 아는 것들 — 전시 서문

살아봐야 아는 것1

다름을 긍정한다는 것. 세상 곳곳을 더 촘촘히 살필 수 있게 된 요즘에는 더욱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듯하다. 기술의 발전은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관계의 문턱을 낮추었지만, 조금도 변하지 못한 인간종(H. sapiens)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끝없이 타자(他者)를 밀어낸다. 나와 다른 존재로서 타인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며, 알 수 없다는 그 미지에 대한 공포는 때로는 타자를 비교와 시기, 증오와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마치 ‘다른 존재’가 내 자리를 빼앗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이를테면, 지난 반세기 동안 전세계 인구는 두 배로 늘었고, 우리는 끝없이 모두가 더 나은 삶을 공평하게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잔인하게도 지구의 자원으로 80억의 인구가 똑같은 풍족한 삶을 살 순 없다. 누군가의 부족함 없는 일상은, 자원의 불균형한 분배로 누군가가 빈곤과 굶주림, 죽음의 공포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에 유지된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외면함으로써 철저히 타자화한다. 평평하지 않은 세상에서, 낯선 타인을 밀어내기. 그것이 우리가 삶과 터전을 지키는 방식이다. 기왕 나의 존재가 살아남아야 한다면, 타인이 겪어야 하는 그 고통의 얼굴에서 눈을 돌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식 철학의 ‘마주하기’란, 사실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가.2 특히 미술에서, 어떤 미술들은 철저하게 전시장에 진열되는 값비싼 장식품이 되어 하나의 동일한 시선—자본주의적 욕망—만을 갖기로 함으로써, 다층화된 세계의 이미지를 담고 기억해야 할 의무를 고리타분한 다큐멘터리들에 던져버리고는, 스스로를 세상과 끊어내어 고립시키기도 한다.

나를 기록하는 투쟁

어밍(엄정원) 작가는 삶의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기억화하는 수단으로서 식물과 빛이라는 상징적 기호를 찾아냈다. 지구에서 바라보는 태양은 매일 동에서 서로 뜨고 지며, 반복되는 하루를 만들어낸다. 직선으로 뻗어 내리는 빛은 식물의 엽록소에 반응하고, 오늘의 식물은 어제의 식물보다 아주 미약한 성장을 해낸다. 작가가 매끼 섭취하는 식단은 체내에서 분해되고, 재조립되어 에너지를 만들고 그의 몸을 구성한다. 단순히 바라보건대, 우리의 몸은 입자의 총합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생명이 그 이상의 무엇임을 알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태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이며, 어밍은 이러한 흐름과 변화를 작업으로 포착하려 시도한다.3

그의 작업은 언뜻 어떤 생태미술(Eco Art)의 범주 안에 있는 듯 보이지만, 많은 생태와 자연, 환경을 말하는 예술들이 자기모순에 빠져 스펙터클만을 남긴 채 소멸해버리거나 지리멸렬한 논쟁만을 남기는 상황에서,4 어밍은 조금 다른 노선을 취한다. 그의 작업은 장소에 깊게 연관되면서도, 대지미술(Land Art)처럼 장소특정적(site-specific)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특정적이다. 작가가 어느 공간에서 타임랩스를 통해 일주하는 태양의 궤적을 추적하고, 빛이 지나간 자리와 식물의 성장을 기록하는 이유는, 그의 몸이 그 장소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어밍의 작업의 주안점은 공간과 환경에 구속되지 않는, 작가 자신의 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작가의 ‘기억하기’는 세계에 자신의 좌표(신체)를 고정하는 행위가 된다. 그는 자신과 주변을 기억-아카이빙함으로써, 망각과 죽음충동의 반대편에서 삶을 지키려 한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하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보겠다>(2022-2023)나, <식물, 농사, 계절, 시간, 움직임, 세상에 관한 생각모음>(2023)은 일종의 작업설명서(statement)가 되는, 직관적인 자기고백이다. 어밍이 최근 몇년 사이 겪었던, 모종의 단절에 기인한 듯한 여러 심경들이 무작위적인 몽타주가 되어 그림일기 형식으로 담긴다. 이것을 마주한 관객이, 작가가 키우고 살리고자 애쓰는 것이 식물이 아니라, 다름 아닌 신체를 갖고 살아 숨쉬는 취약한 존재—지속적으로 변하는 하나의 흐름—로서의 작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에겐 식물처럼 뿌리를 단단히 하는 시간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과거엔 엄정원이라는 이름으로 미술을 통해 사회와 타인들의 관계 구조를 직시하고, 세상을 마주하고, 연대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했다면, 지금의 어밍은 자신의 흔적을 어떻게든 남기고 보존하는데 몰두한다. 마치 지금 여기의 세상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가 중요해져버렸다는 듯이.

우리는 식물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어밍이 세계에 자신을 기록하고자 시도하는 방법론은, 자신의 흔적을 따라 세상을 기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질경이, 너는 느낀다>(2023), <발자국> 연작(2023)과 같이 너무 작고 사소해서 잘 보이지 않는 세상의 단편—이끼 사이에 핀 작은 풀—이나, 혹은 <해와 눈을 마주쳐보라> 연작(2023), <2023년 3월에 음식물퇴비를 모아 발효시킨 흙과 그 흙에서 키운 강낭콩>(2023) 처럼 너무 거시적이어서 사람의 감각으로는 선뜻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질서—생명의 성장과 부패, 태양의 일주 등—를 수집하여, 관객의 눈 앞에 전달한다. 지각하기 힘든 것을 감각하게끔, 그럼으로써 이해하기 힘든 것을 이해하려 시도해볼 수 있도록 말이다.

분명 ‘나’는 내가 아닌 ‘너’가 될 수 없다. 태어난 순간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나는 신체가 느낄 수 있는 감각 이외의 것을 알 수 없다. 나는 개와 고양이가 맡는 도시의 냄새가 어떨지 알 수 없고, 새가 바라보는 하늘과 자기장이 어떤 경치일지 알 수 없다. 벌과 개미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도, 풀과 나무가 외부를 어떻게 인식할지도 알지 못한다. 세상은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세상을 재현한다는 것은, 어쩌면 인지할 수 없는 다름에 대해 끝없이 상상하고 이해하려는 시도이자, 결코 완수할 수 없는 과제가 아닐까.

예술은 매순간 우리의 사고와, 언어와, 상상력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반증한다. 그러나 삶을 살아 나가는 여정이, 타자와 내가 끝없이 연결되어 있음에 의해 주어지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빈약한 상상력으로나마 다름을 마주하는 방식들을 계속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번역 불가능성은 이해 불가능성과 동의어가 아니다.


  1. 본 전시의 제목 ‘살아봐야 아는 것들’은 어밍(엄정원) 작가의 2020년 울산 북구예술창작소 감성갱도2020 레지던시 결과보고전 당시 우정아의 평론 ⌜살아봐야 아는 것들: 엄정원과 식물의 움벨트⌟에서 가져왔다. 

  2. […]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154. 

  3. 후쿠오카 신이치(福岡伸一)는 생명을 동적평형(dynamic equilibrium)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는 이를 “외발자전거를 타고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비유한다. 福岡伸一, 『動的平衡—生命はなぜそこに宿るのか』, (木楽舎, 2009), 233. 

  4. 마이클 헤이저(Michael Heizer), 로버트 스미스슨(Robert Smithson) 등의 작업을 보자면, 생태와 환경이 미술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