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 4일부터 내년 3월 31일까지,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큐빅하우스에서는 장한나 작가의 《뉴 락 New Rock》 전시가 진행 중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마치 어떤 자연사박물관에 들어선 것처럼, 크고 작은 돌들이 여러 형태로 전시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새로움(new)이란 무엇일까? 장한나의 작업을 목도하며 가장 처음 머리 속에 떠오르는 질문이다. 작가는 버려진 플라스틱 폐기물들이 자연 속에서 풍화되고 녹으며 자연물과 결합하는 등, 마치 돌과 같은 형상(plastiglomerate)이 된 것을 가리켜 ‘뉴 락’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새로운 암석이다.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이 지칭은 다분히 아이러니하다. 새로움이란, 기존과는 다른 시작을 일컫는 표현인데, 작가가 말하는 ‘새로운 암석’들은 마치 어떤 마지막이나 상실을 뜻하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모순된 감각은 전시장에 나열된 장한나의 작업 전반에서 계속 드러난다. 그가 수집한 플라스틱 돌들은 마치 지구의 역사 속에서 항상 존재해왔던 것처럼, 자연이 품은 숭고와 경이가 그대로 투영되는데, 그 외양에서 인공물과 자연물 사이의 경계는 미묘하게 비틀린다. 더 나아가, 작가는 폐스티로폼 속에서 집을 짓고 사는 개미들처럼 폐기물과 어우러져서 살게된 생명의 흔적들을 보며, 자연이 플라스틱 쓰레기조차 받아들이고 품었다고 말한다. 벽면 곳곳에 적힌 그의 텍스트는 자연을 ‘무한히 너그러운’ 대상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연을 우리의 빈약한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로 위치시킨다. 따라서 장한나가 말하는 이러한 포용자로서의 자연은, 대중매체가 많이 노출하고 있는 방식처럼 인간의 환경파괴에 의해 ‘다치고, 병들며, 무너지는’ 객체의 위치에 있지 않다.
여기서 작가는 함부로 반성이나 교훈을 들이밀지 않고, 판단을 유보한다. 문제를 단순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시선을 회피하지도 않는다. 단지 플라스틱 쓰레기에 의한 생태계 변화의 결과물들을 관객의 눈 앞으로 가져온 채, 우리가 이런 변화들—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물을 뿐이다. 마치 ‘뉴 락’들을 통해, 우리가 매일 맞닥뜨리는 현실이 여러 모순들이 뒤엉켜 중층결정된 이미지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듯 보인다. 해변에서 발견하는 플라스틱 돌들은, 인간/자연과 같은 이분법적 사유로는 극복할 수 없는, 생태와 문명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단편이 된다.
지난 20세기부터 인류가 문화라 부를 수 있었던 모든 이기(利器)들은 플라스틱 체제(system) 하에서 이룩되었다. 플라스틱은 물품을 생산하기 위해 동물들을 죽이거나, 숲과 대지를 훼손해왔던 인간이 실험실 안에서 분자를 합성해서 만들어내게 된 소재로, 당시 기준으로 친환경-생태적인 물질이었고, 문명을 진일보시키는데 기여했으며, 많은 이들이 플라스틱에 의해 구원받았다.1 대량소비와 자본주의 아래에서, 우리는 플라스틱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플라스틱은 현대문명 그 자체이며, 우리의 삶이 이미 그 합성물질 속에 포화되어 있는 까닭이다. 찬란한 진보는 역설적으로 미세플라스틱과 같은 형태로 위협이 되어 되돌아오고, 우리 모두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이빨대 쓰기’와 같이 눈 앞에 보이는 심리적 위안 찾기만 급급할 뿐, 그 거대한 구조(hyperobjects)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매일은, 사소한 원인과 결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하게 얽혀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뉴 락》에서의 ‘새로움’이란, 돌을 구성하는 재료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그것(생태)을 바라보는 새로운 사고와 시각에 대해 말하는 전반적인 은유로 읽는다면 너무 확대해석일까. 우리의 시각과 지식은 턱없이 부족하고 빈약하며, 유한하지만, 동시에 유연하다. 지금 당장 답을 내놓지 못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나 거대 서사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고, 그 복잡한 관계를 조망할 수 있게끔 한다는 점에서, 장한나 작가가 진열해 둔 아름다운 돌들은 분명 새롭고 가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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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 작가의 플라스틱 작업에서 보이는 것처럼, 대량생산된 플라스틱 공산품이 한국의 현대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