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용산, 윈드밀이라는 이름의 어느 지하에서
지하에서의 몽상
지하로 들어간다는 것은 특이한 감각이다. 지상에 서 있는 자들을 위로 두고, 자신을 그 아래로 내려보내는 것. 그것은 마치 이 도시 속에서 가장 겸손해지는 방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엔 동선을 따라 완만한 경사, 계단, 엘리베이터와 같은 것들이 추락과 낙하를 방지하기 위해 설치된다. 안전을 위해 만들어지는 여러 구조물들 덕에 당신은 쉽사리 겸손해지지 않을 수 있다.
비릴리오(Paul Virilio)가 우려했던 방향대로, 우리는 모든 것이 보이는 사회에 살고 있다. 곳곳의 감시기계는 이 땅의 모든 이들을 비추지만, 지하만큼은 그 시선들도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빛이 닿지 않는 비밀스럽고 고립된 환경은 공기의 흐름 뿐만 아니라, 모든 감정과 인간의 유대마저 그 아래에 가두어둔다.1 유달리 서울에서만 있다는 반지하 주거 공간은 어느덧 너무 당연히 청년과 빈자의 삶의 터전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지하층은 우리네 곳곳의 많은 미술 작업실 겸 전시—특히 대안이라는 이름을 붙이는—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콘크리트 지하의 미술은, 많은 갤러리와 비평가들이 찾아 헤매던 바로 그 ‘한국형 미술 브랜드’의 냉소적 버전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곳엔 눅눅한 콘크리트 벽면이 만들어낸 ‘물성’과 차가운 ‘백색’의 미, 그리고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빈곤과 궁핍이라는 ‘비움’의 수행적 미학조차 존재한다. 나는 미술경매사들이 그 지하의 삶의 경험을, 고여서 썩어가는, 숨막히는 공기의 옥죄임을 사고 팔 수 있길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우리의 미술이라 부를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땅 밑에서 숨을 쉰다는 것
민지훈 작가는 땅 아래를 바라보기로 한다. 이번 《언더그라운드 랩소디 Underground Rhapsody》에서 센서와 모터를 통해 입력된 행동을 되풀이하는 기계들은, 삶의 주기를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가련한 존재들이 되어 지하 공간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2 그곳에서 작가가 치밀하게 준비한 정연한 기계극(機械劇)은 보는 이의 시간을 천천히 연료로 가져가 조심스레 자신을 움직인다. 민지훈의 작업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무엇보다 근본적인 행위이자 의식이다. 이번 전시는 보이지 않는 서사, 비물질적인 감정, 감각과 같은 것들을 어떻게 가시화 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예술가가 제시할 수 있는 모범적인 설계도로 보이는데, 작가는 비물질적 가치들을 물질화하는 데 있어서 근대의 상품물신주의 신화에 크게 이바지한 어떤 포드주의(Fordism)적 기름 냄새를 풍기는 기계장치와 전기회로들을 이용하면서도, 그 기계적 움직임에서 쓸모와 효용을 철저히 폐기하고, 지하에 밀봉한다. 민지훈의 기계는 더 이상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을 그만둠으로써, 마침내 현실을 재현하는 리얼리즘이 되었다.
전시장 초입에 위치한 <뜻 밖의 훈련>(2023)에서 서로 얽히고설킨 환풍기들의 절박한 흡기와 배기를 보자면, 숨을 쉬는 것, 그리고 물리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시간 안에서 벡터와 속도를 가진다는 것—이 이토록 치열할 일인가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다. 이어지는 <빛의 꼬리를 바라보는 일(2023)에서, 움직임은 어떤 절규로 변한다. 쉴 새 없이 어둠에 몸부림치며 비틀리는 은색의 덕트호스는, 위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전구빛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 듯, 똬리를 틀던 것을 멈추는데, 사실 그 작은 위안의 순간에 내려온 빛은 구원의 태양이 아니라, 한낱 거짓된 인공의 빛이다. 그럼에도 어떠한가, 끔찍한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그것을 반복적으로 마주함으로써 끝없이 외상을 입고 무뎌지든가, 실재(the Real)를 외면하고 무언가 집중할 수 있는 모르핀(spectacle)을 찾든가의 양자택일일 뿐이다.
추락할 수 있는 권리
전시장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위치한 <세번의 흡과 한번의 호>(2023)는 이번 전시의 서사적 결말 지점이다. 어둠 속에서 경고등처럼 붉은 빛을 발하고 있는 으스스한 기계장치는 바닥에 설치된 페달 스위치와 연결되어 있다. 스위치를 조심스레 밟으면, 찢어지듯 공기를 빨아들이는 기계음이 마치 끔찍한 무언가를 깨우려는 것처럼 지하 전체로 퍼져나간다.3 한 번, 두 번, 세 번의 흡기를 끝내자, 갑작스레 밝은 빛이 켜지며 어둠은 깨지고 비눗방울이 하늘을 향해 터지듯 솟아오른다. 그렇게 밀폐된 어둠 속에서 마주한 유년의 공포는, 한낮의 볕 아래서의 우스운 추억으로 부수어지고 마는 것이다. 분명, 수직의 도시를 겁도 없이 거꾸로 올라가려는 비눗방울(날숨)의 오만함은 어린아이의 순진함을 닮았다.
본디 무덤이나 카타콤(Catacombs)처럼, 지하는 사람의 유골이 묻히는 공간으로서 죽음의 공포에 가장 가까운 장소였다. 그러나 이제 도시의 아래는, 우리의 미래 세대가 삶과 가능성을 끝없이 되묻는 빈틈으로서의 특징적 공간이 되었다. 지상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가파르게 주거 환경과 생존(삶)은 점점 분리되고, 접점은 멀어진다. 드높은 마천루, 이를테면 시그니엘의 펜트하우스에 사는 사람이 집과 생존을 연결지어 생각해 볼 이유가 당최 있을까? 그러므로 그 특권—주거와 생존의 긴밀한 연결점을 아는 것—은 오롯이 그 반대 방향에 있는, 지하로 파고드는 자들의 것이다.
지상과 지하를 가르는 천장에 가로막힌 공기는 인간의 조건을 다르게 만든다. 그러나 땅 아래 사는 자들은 적어도, 삶의 처절함과 비참함을 알지 않는가. 일단 지하에 이르러서는 도무지 추락할 방도가 없는 법이다. 관람을 마친 관객은 전시장을 뒤로 하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다시 추락 가능성을 안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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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외로움의 징후는 주변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연결되고자 하는 열망,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갈망, 친구가 없다고 느껴질 때의 쓸쓸한 기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우리 시대 외로움의 징후는 우리가 정치인과 정치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 우리의 일과 일터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느낌, 사회의 소득에서 배제되어 있다는 느낌, 스스로가 힘이 없고 무시당하는 존재라는 느낌까지 아우른다.” 노리나 허츠, 『고립의 시대 : 초연결 세계에 격리된 우리들』, 홍정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21), 2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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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득이하게 민지훈의 작업을 의인화하여 묘사하고 있지만, 그의 작업이 어떤 최우람식 기계-생명체와 같은 맥락에서 읽히지 않길 바란다. 둘의 작업은 키네틱(kinetic)이라는 요소 이외에 거의 아무런 접점이 없는데, 민지훈의 작업은 일말의 메타포는 있을지언정, 모방하거나 모사할 뚜렷한 대상이 없으며, 공간이 중요한 무대장치일 뿐만 아니라 작업의 주요 개념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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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의 몽상가는, 지하실의 벽이 땅 속에 묻힌 벽, 이쪽 벽면 밖에 없는 벽, 그 뒤에는 전 지구의 땅이 가로막고 있는 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드라마는 고조되고, 공포는 과장된다. 하지만 과장되기를 멈추는 공포란 공포일 수 있겠는가?”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곽광수 옮김, (동문선, 2023), 116 ↩